2012년 0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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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만약 최종 목적지까지 가서 그 사람들과 동일한 곳에서 서로 만나게 된다면 도리어 상봉하기 전에 서로 다툰 것이 무색하지 않겠는가. 나도 배우는 사람이요, 상대방도 배우는 이라면 다 아직 목적지에 못 간 사람이니, 중간 가르침으로 어찌 목적지의 경계를 다툴 것인가. 중간 다툼은 승리도 없고 패배도 없으며, 옳음도 없고 그름도 없다고 본다.
    - 봉우 권태훈

연보(年譜) (1900∼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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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0년(庚子): 1세 경자(庚子:1900년) 음력 정월 20일 서울 재동(齋洞) 출생. 본관(本貫) 안동(安東). 자(字)는 윤명(允明) 또는 성기(聖祈), 아명(兒名)은 인학(寅鶴). 부친은 당시 대한제국의 내부(內部) 판적국장(版籍局長) 취음(翠陰) 권중면(權重冕)으로, 선생은 45세의 나이에 얻은 외아들이었음. 여말선초(麗末鮮初)의 명신(名臣)이자 대학자였던 양촌(陽村) 권근(權近)이 선생의 17대조요, 임진왜란의 구국명장(救國名將) 권율(權慄)이 11대조. 호(號)는 여해(如海), 봉우(鳳宇), 물물자(勿勿子), 연연당(然然堂). ◈ 1903년(癸卯): 4세 한학(漢學) 배우기 시작. ◈ 1904년(甲辰): 5세 고종황제 배알. 황제가 베푼 덕수궁연회에 부모와 함께 참석하여 사배(四拜)를 올리고 [황제폐하만세] 삼창[이것을 산호(山呼)라 함]. 부친은 대한제국 중추원(中樞院) 칙임의관(勅任議官)으로 재직. 집안 대소가(大小家) 모두 전성시대였음. 일로(日露)전쟁 발발. 모친은 숙부인(淑夫人) 경주김씨(慶州金氏). 절충장군상호(折衝將軍商浩)의 여(女). 부친, 이후 법부(法部) 검사국장(檢事局長), 한성재판소 판사비서원승(判事秘書院丞), 시종원(侍從院) 시종, 고등재판소 판사, 법원비서관 등을 역임. 신축년(1901)에 평산(平山)군수, 칙임의관(勅任議官), 을사년(1905) 봄에 진도군수, 정미년(1907) 능주(綾州)군수 역임. 고종황제 때인 을미년(1895) 출사(出仕:벼슬에 나감)하여 내외직(內外職) 두루 지냄. ◈ 1905년(乙巳): 6세 부친, 봄에 진도(珍島) 군수로 외임(外任:외직임명). 정배(定配:귀양감)중이던 당시 소론팔재사(少論八才士)의 한 사람인 무정(茂亭) 정만조(鄭萬朝) 선생께 한학(漢學) 수학(受學), 사서(四書) 읽음. 일로(日露)전쟁, 일본의 승리로 끝남. 일본과 을사보호조약 체결됨. 당시 농상대신(農商大臣)으로 여기에 서명한 둘째 백부(伯父) 권중현(權重顯)과 그 아우였던 부친은 진도에서 서신으로 대의명분(大義名分)을 논하다 필경은 단의(斷義:형제의 의를 끊음). 모친에게 민족고유 정신수련법인 조식법(調息法)을 처음으로 배움. 모친은 아들에게 한학 공부를 더 잘하기 위한 방법을 가르쳐준다며 기억력증진법으로써 소개하였다 함. ◈ 1906년(丙午): 7세 진도에서 보냄. ◈ 1907년(丁未): 8세 사서삼경(四書三經)과 13경(十三經)을 포함하여 수백권의 경서(經書)를 읽음. 집안 상경(上京). 부친, 능주(綾州)군수로 부임. 정미칠조약(丁未七條約)이후 고종황제가 강제퇴위 당하자 벼슬 버리고 다시는 관계(官界)에 나서지 않음. ◈ 1908년(戊申): 9세 부친, 토혈증(吐血症)으로 위중한 가운데에서도 선서(善書:도교경전) 인간(印刊)에 전력을 다함. ◈ 1909년(己酉): 10세 벽진(碧珍) 이씨(李氏) 친영(親迎:결혼), 성가(成家). 서울 종로 마동(麻洞) 단군교(檀君敎:현 대종교) 포교당(布敎堂)에서 우연히 도사교(都司敎) 나철(羅喆) 선생을 뵙고 수교(受敎:가르침을 받음). 이후 일평생의 정신적 뿌리로 삼음. ◈ 1910년(庚戌): 11세 한일합병으로 대한제국 멸망. 부친, 충북 영동(永同)으로 낙향. 처음엔 영동읍 금리(錦里)로 갔다가 다음해 영동읍 남당리(南堂里)로 이사. ◈ 1911년(辛亥): 12세 영동(永同)보통학교 2학년 편입. 교사들로부터 수학의 천재라는 칭찬 받음. 3년간 통학. 영동의 천마산(天磨山) 삼봉(三峯) 정상에서 소학교 동창 이홍구(李洪龜), 안명기(安明基), 지도교사 박창화(朴昌和) 선생과 함께 민족독립과 세계최강국 건설 및 세계평화에 헌신할 것을 맹세. 보통학교생으로서 일본유람단에 끼여 처음으로 외국문물에 접함. 당시 영동보통학교의 학생년령은 최고 35세에서 최소 12세, 교장은 일인(日人) 판정산일(坂井散一). 한문(漢文), 수학, 조선어, 습자(習字), 수신(修身) 과목을 배움. 특히 한국인 교사인 박창화(朴昌和) 선생께 애국심을 배움. ◈ 1912년(壬子): 13세 백부(伯父:큰아버지) 하세(下世). 실인(室人:아내) 조요(早夭:일찍 죽음). 평해(平海) 황씨(黃氏) 재영(再迎:재혼). 소년시대의 불행이었음. 민족선도계(民族仙道界)의 거인(巨人)이신 우도방주(右道坊主) 김일송(金一松) 선생을 충북 영동에서 처음으로 만나뵘. 이때 일송 선생은 병객(病客)으로 부친의 사랑방에 머물고 있었고 봉우 선생은 병간호를 극진히 하였다 함. ◈ 1913년(癸丑): 14세 영남(嶺南) 유림(儒林)의 태두(泰斗)인 면우(I宇) 곽종석(郭鍾錫) 선생 배알(拜謁). 곽선생과 부친과는 친교가 있었으므로 가끔 서신왕래가 있었고, 이 해에 직접 부친의 서신을 휴대하고 처음 찾아뵈었다 함. ◈ 1914년(甲寅): 15세 가도(家道:가세) 아주 패함. 보통학교 졸업. 당시 도변(渡邊) 교장의 추천으로 경성제일고보에 무시험 입학되었으나 부친의 불허로 좌절. 선생 자신은 부친의 반대이유 외에 전문부(專門部:대학) 입학을 목표로 진학 하지 않았으나 부친의 중병(重病)과 이듬해 모친의 중병으로 결국 진학을 포기하게 됨. 이것이 자신의 용단성(勇斷性) 부족으로 일생의 진로를 그르친 것이며, 부모의 간병(看病) 이유로 어찌 유학(遊學)할 수 있겠는가 하는 선입감으로 미래의 낙후(落後)를 자감(自甘)한 것이었다고 회고(1964년 일기 중). 부친의 병환이 한때 위중하였으나 유의(儒醫) 이규신(李圭信) 선생의 처방으로 신효(神效)를 봄. 재차 일본 입국. 대판(大阪) 조일신문(朝日新聞)에 난 광고를 보고, 당시 일본 기합술계(氣合術界)를 풍미하던 태영도(太靈道)의 전중수평(田中水平)과 심리학자로 대일본최면술협회의 대가였던 전궁형(田宮馨), 세계정신○○도(道)의 고옥철석(古屋鐵石)1 및 당시 일본 정신계의 태두(泰斗)였던 원선불(原仙佛:하라)2, 그 제자 기바라(木原鬼佛)3, 최면술 박사 궁기옹(宮崎翁) 등 수십여 명과 교유(交遊). 특히 기바라의 금계학원(金鷄學院:동경 소재)에 머물며 기바라 선생의 특별후원과 배려(제자들 교육 현장을 견학토록 함)를 받았다. 시코쿠[四國]에 있는 송강도장(松江道場)에서 정신도계(道階) 2계(아홉 단계 중 위에서 두번째)를 받음. 또한 당시 유도, 검도계의 명인(名人) 스즈끼(鈴木)도장에서 검도(6단), 유도(6단)도 배움. 일본에 오기 전 한국에서 이미 [잡기]라는 재래체술(在來體術)을 상당 부분 익혔고, 삼촌께 검도도 배운 상태였음. 검도는 한 번의 대결로 6단의 예우를 받았음.
1) 그는 ‘경천동지적(驚天動地的) 교수법’ 운운하며 신문에 광고를 내고 사람을 모아 유료로 가르쳤다.
2) 원담산(原担山)이 본명으로, 일본 명치(明治)시대 조동종(曹洞宗)의 걸승(傑僧). 거의 생불(生佛)의 경지에 도달한 인물이었다 함. 신림청조(神林請助)에게 역(易)을 배우고 막부(幕府)의 창평학(昌平學)을 졸업한 후 불문(佛門)에 들어감. 명치 12년에 동경제국대학 인도철학과의 최초 강사. 24년 조동종 대학림(大學林)의 총감(摠監). 정광진인(正光眞人)에게 불결(佛訣)을 전수받고, ‘병의 원인은 외촉(外觸 : 외부의 접촉)이 아니라 내촉(內觸)에 있다’, ‘혹병(惑病)은 뇌에 이르러 결체(結滯)해서 전신에 만연되는 것이다’라고 해서, 목숨을 건 실험에 의해 ‘정력(定力)’이라 칭하는 일종의 정신력에 의해 뇌와 척추의 접로(接路)를 영적으로 컨트롤하는 것으로 전신에 만연해 있는 망식(妄識)을 구제하는 치병(治病) 행법(行法)을 확립했다. 원단산은 뇌와 척추의 접로(接路)에서 청신경(聽神經)이 관여되어 있다고 하여, 그 행법을 이근원통법(耳根圓通法)이라고도 칭한다. 스스로 죽을 시기를 깨닫고 주변 사람들에게 엽서를 보낸 후, 다들 모인 자리에서 알린 시각에 정확하게 맞춰 입적(入寂)했다.
3) 일본 명치에서 대정(大正)시대의 정신계 거물. 유년시절부터 병약하여 폐결핵을 앓던 중, 영적(靈的) 치료에 의해 회복된 것에서 광명을 발견하고 그 후 도(道)의 연구에 뜻을 두었다. 하라(원단산)의 문하생이 되어 ‘이근원통묘지요법(耳根圓通妙智療法)’을 전수받음. 이로 인해 영술가(靈術家)로 일세(一世)를 풍미하고 명치 39년에는 시코쿠사국(四國) 도근현(島根縣) 송강(松江)에 ‘조진도장(照眞道場)’을 엶.
◈ 1915년(乙卯): 16세 신병(身病)으로 외부출입하지 않음. 가을부터 이윤직(李允稙) 군과 삼추삼동(三秋三冬)을 한학(漢學) 전공함.◈ 1916년(丙辰): 17세 동짓달에 충북 영동에서 충남 공주 상신리(上莘里)로 이거(移居). 부친, 피난차 산중에 은둔. 신병(身病)으로 계속 고통받음. ◈ 1917년(丁巳): 18세 선비(先비'죽은어미비 :모친), 47세로 조요(早夭). 가도(家道)가 말할 수 없이 피폐해짐. 서계원(徐啓源), 서영원(徐永源), 서기원(徐基源), 유덕영(柳德永) 제익(諸益)과 교제함. 스승 정만조(鄭萬朝) 선생의 추천을 받아 당시 장안 재사(才士)들의 모임인 서울 이문회(以文會)에 출입함.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 벽초(碧初) 홍명희(洪命熹),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임규(林奎), 권덕규(權悳奎), 홍헌희(洪憲熙) 등과 교유. 부친과 평소 친교가 있던 설봉(雪峯) 지운영(池雲英) 선생과 지석영(池錫永) 선생 만남. '선비(先비'죽은어미 비':모친)께서 다한(多恨)한 이 세상을 버리시고 중병을 가지시고 돌아가시었다. 불초(不肖)가 연유(年幼)한 관계로 극력(極力) 치료도 못 해본 것이 내 일생 한(恨)이 되는 것이요, 수한(壽限)이 47세라는 요(夭)를 면치 못하신 것이 더구나 한이 된다. 내가 철이 없어서 선비(先%)의 유훈(遺訓)을 지키지는 못하였으나, 나이가 먹을 수록 선비께서 현모(賢母)였고 또 성모(聖母)였었다는 감이 점점 더 두터워간다. 이전의 선철(先哲)들 누구보다도 귀하신 성모(聖母)를 불초가 모시고도 참으로 불초해서 그 유훈의 만일(萬一)을 행하지 못하고 불초도 백발이 성성한 일개 노옹(老翁)이 되었으니 어찌 감개무량하지 않으리요.' (1954년 3월 12일 회고 중) ◈ 1918년(戊午): 19세 전국적 유행감기로 사망률이 상당수에 달함. 연말에 고종황제 승하. 공주 상신리(上莘里) 집에서 김일송(金一松) 선생을 다시 뵙고 구월산(九月山:황해도 소재)으로 동행, 입산하여 스승으로 모시고 약 3개월 간 민족고유의 선도(仙道) 수련, 입문(入門)함. 27일 만에 산차(山借)4 삼통(三通)함[결사(決事)는 하지 않음]. 좌도(左道), 우도(右道)의 각종 심법(心法)을 전수받음. 계룡산 북사자대(北獅子臺)에서 동지 규합, 처음으로 정신수련 결사(結社) 시작함. 백두산 순례 후 면우(I宇) 곽종석(郭鍾錫) 선생 찾아뵘. 인천 미두장(米豆場)에서 산주(汕住) 박양래(朴養來:12세 연상) 처음 만남. 전북 황등에 사는 이인(異人) 신석태 옹 만남. 이외에 박동암(朴東庵), 윤신은(尹莘隱), 서직순(徐稙淳), 서만순(徐萬淳)과 만나 친교.
4) 무차(武借)의 대표격으로, 상세한 내용은 《민족비전 정신수련법》 p. 163에 수록. ◈ 1919년(己未): 20세 3.1독립운동. 기미독립선언서 배포(경북 평해에서부터 동해안 따라 함경도 원산까지 배 타고 다니며 항구마다 선언서를 뿌림). 3.1운동 이후 만주에 들어가 당시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의 [상승장군(常勝將軍)] 노은(蘆隱) 김규식(金圭植:?~ 1929) 선생 만남. 김장군은 대한제국 시위대 부교(副校)로 있다 1907년 일제에 의한 군대 강제해산 전에 부대를 이끌고 의병을 일으킨 후 만주에서 무장독립운동에 전념하던 인물로, 전략전술과 실전에 있어 기존의 어떤 무장투쟁가보다도 뛰어난 공적으로 일본군과 백전백승한다 하여 [상승장군]으로 당시 만주독립운동계에 유명하였다 함. 선생은 우연히 김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무장항일투쟁에 처음으로 투신하게 됨. 이후 역시 위대한 독립운동가이신 동천(東川) 신팔균(申八均)5선생과 만나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막역한 동지요 의기투합한 지기(知己)가 되었으나, 동천(東川) 선생이 먼저 전사(戰死)하였음. 3.1운동 이후 약 4년간 만주 출입하며 독립군 생활.
이후로 국내에 근거를 두고 미미한 지하운동으로 외면상 신문기자, 생명보험 외판원, 약품채약상, 각종 행상, 투기업자 등의 백면(百面) 백작(百作)으로 동지규합에 노력. 아울러 유사종교의 간부진들도 동원해 보고 학교 교원진들도 움직여 봄. 해방 전까지 공섭단(共涉團), 연방사(聯芳社), 동지계(同志契), 상애단(相愛團), 의열단(義烈團) 등 각종 집회로 동지규합에 전력을 다한 결과 동지가 수백명이 되었으나 해방 후 대부분 군(軍), 관(官)에 투신하고 사상적 전환으로 백여명 남음. 그나마 6.25사변으로 50여인 죽음. 추수학(推數學)으로 물가앙등을 예지함. 윤보병(尹普炳), 조기하(趙琪夏), 주회인(朱懷仁), 조석운(趙石雲), 박학래(朴鶴來), 김일창(金一滄), 제익(諸益)과 친교. 정신수련, 동지규합, 군자금 모금 등 활동도 계속함.
5) 1882년 한성(漢城) 정동(貞洞) 출생. 1907년 대한제국 육군 정위(正尉). 군대 강제해산 후 1909년 윤세복(尹世復), 김동삼(金東三), 안희제(安熙濟) 등과 대동청년단 조직, 국권회복운동 전개. 1910년 국치 후 곧 만주로 건너감. 1918년 겨울, 3·1독립선언의 전주곡이 되는 무오독립선언 39인의 1인으로 서명함. 1919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가담. 이청천(李靑天)등과 신흥무관학교 교관 취임. 이후 1922년 통의부(通義府) 사령장(司令長)으로 피선, 군사위원장 겸임. 무장독립운동의 선두에 서서 수십차 일본군과 격전, 대승을 올림. 1924년 7월 2일 홍경현 왕청문(旺淸門) 이도구 밀림 속에서 일군(日軍)과 마적이 섞인 수백명에게 포위되어 격전중 장렬히 전사. ◈ 1920년(庚申): 21세 우연한 신병(身病)으로 6개월 와병. 기적적으로 생명 보전함. 이 병이 계기가 되어 도호(道號)를 [봉우(鳳宇)]라 함. 추수학(推數學)으로 물가폭락을 예지함. 재산 탕진, 방랑생활 시작. 조훈(曺勳), 허일(許一), 김철진(金哲鎭), 김장렬(金壯烈) 제군(諸君)과 친교함. '1917년 모친 작고 후 서모(庶母)가 들어오고, 서모의 괴팍한 성격으로 불화하였다. 내 장지(壯志)는 비거천만리(飛去千萬里:천만리를 날아감)하고 방랑생활로 일시적 위안을 하고 다녔다. 이것이 내 중년 초까지의 불행이었다. 그 중에서 광달흉해(廣達胸海:가슴의 포부를 넓힘)라고 할까, 이문목격(耳聞目擊)한 등에서 약간의 상식은 얻게 되고, 방랑에서 협의행각(俠義行脚)으로 나가서 경제관념에 아주 소홀했던 관계로 궁불능자존(窮不能自存:궁핍하여 살아가기 힘듦)했으나, 조금도 불굴(不屈)하고 여전히 협의자처(俠義自處)하고 다녔다. 그러다 부친께서 81세에 하세(下世)하시고, 사회조류도 협의행각을 허용치 않으며, 더구나 왜정 때 고등 요시찰이 되어 영어(囹圄)생활도 상당한 횟수였다. 사회적이나 경제적이나에 진로(進路)가 몇 번 있었으나 모두 내가 기권한 것이었다. 그 후 을유광복이 되어 신생(新生) 애국애족자가 우후죽순같이 나오게 되자 이것도 염증이 나서 아주 기권하고 말았다.' (1964년 수필 「회상기(回想記)」 중) ◈ 1922년(壬戌): 23세 토혈증(吐血症)으로 욕을 봄. 우연히 신방(神方)을 얻어 쾌유함. 해외로 왕래하며 유랑생활로 가정생활은 형편없이 곤란해짐. 조일운(趙一雲), 이화암(李華庵), 이화당(李華堂), 정수당(丁隨堂). 하신부(河信夫), 김태부(金太夫), 김오운(金烏雲), 김봉규(金鳳奎) 제위(諸位)와 친교. ◈ 1923년(癸亥): 24세 아들 영창(永昌) 조요(早夭). 낭인(浪人)생활 계속. 신병(身病)으로 큰 출입 못함. ◈ 1924년(甲子): 25세 극도의 생활고. 호남 여행. 김봉두(金奉斗), 박호은(朴湖隱:당시 전남의 유림) 도유사(都有司), 황기문(黃奇門) 제위와 친교. 중국에 들어감. 전생(前生) 찾아감. 전생은 중국 산동성(山東省) 소재 주씨가(周氏家)의 부인(夫人)이었음. 성은 왕씨(王氏)였음. 전생의 가족들을 확인함. 당시 중국 도계(道界)의 살아 있는 최고 신선(神仙) 왕진인(王眞人)을 나부산(羅浮山:광동성 소재)에서 만남. 중국 도교(道敎) 오두미교(五斗米敎)의 발상지인 용호산(龍虎山:강서성 소재)의 장천사(張天師) 도릉(道陵)의 유적 답사. ◈ 1925년(乙丑): 26세 호남 광주에서 객지생활(이듬해까지). 이용련(李容連), 김창숙(金昌淑), 서몽암(徐夢庵), 이옥강(李玉岡), 전백인(全白人), 백락도(白樂道), 문수암(文殊庵), 김현국(金顯國) 등과 교유. 원상(原象) 공부 시작. 초여름 소성(邵城:인천)에서 20여명 동지와 함께 정신수련. ◈ 1926년(丙寅): 27세 광주에서 약종상(藥種商) 허가받음. 계속 객지생활. 종래 취미있던 문학을 아주 전환해서 심리학(心理學:정신학)으로 전공과목을 정하여, 이 방면으로 동지를 규합하며 함양시키는 데 미력을 경주하였음. 민족운동가들과는 계속 왕래함. 다른 방면의 친구들과는 좀 한산해짐. 이후로 규합한 동지 제위는 차종환(車宗煥), 김설초(金雪樵), 한강현(韓康鉉), 최승천(崔乘千), 김일승(金一承), 주형식(朱亨植), 신훈(申塤), 오송사(吳松士), 한인구(韓仁求), 민계호(閔啓鎬), 이용순(李用淳), 한상록(韓相錄), 조철희(趙哲熙), 임지수(林志洙), 권오훈(權五勳), 박하성(朴河聖), 김학수(金學洙) 등. 불교계 교유 혹은 사사(師事) 인물은 경허사(鏡虛師), 수월(水月), 혜월(慧月), 만공(滿空), 한암(漢庵), 석상(石上), 학명(鶴鳴), 용성(龍城), 용운(龍雲:만해), 만우(萬愚), 상로(相老), 경운사(鏡雲師) 등. 유교계(儒敎系) 인물로는 만나뵌 중 면우(I宇) 곽종석(郭鍾錫) 선생이 가장 위대하였으며, 전간재(田艮齋) 선생은 순문학자(純文學者)였지 도학자(道學者)는 아닌 것으로 생각되었다 함. ◈ 1927년(丁卯): 28세 상신리(上莘里) 본가로 귀가. 청년운동 조금 함. ◈ 1928년(戊辰): 29세 다시 객지로 왕래 시작. 인천 미두장(米豆場) 출입. 금강산, 묘향산 석굴 수련. ◈ 1929년(己巳): 30세 중국 왕래(3차 중국행. 20대 초부터 40대 초반 해방 전까지 10여 차례 왕래함). 북경지역에서 약 6개월 머물며 당시 외교부장 왕정정(王正廷)6, 오조추, 고유균(顧維鈞)7, 풍옥상(馮玉祥)8, 녹종상(鹿鍾祥)9, 원극문(袁克文)10 등과 교유. 중국의 전통적 정신수련 결사(結社)인 [천일선(千日禪)] 제도 참관. 겨울에 계룡산 갑사(甲寺)계곡에 입산하였으나, 단기(短期) 하산함.
6) 1882~1961. 절강성 봉화(奉化) 출신. 신해혁명 이후 북경정부의 요직을 지냈으며. 1919년의 파리강화회의. 1923년의 대소(對蘇) 국교 회복을 위한 절충, 1925년의 관세자주권의 획득 등에 활약했으며, 후에 외교부장 · 주미대사 등을 지냄.
7) 1888~?. 중국의 외교관. 학자. 컬럼비아대학 졸업. 1919년 파리강화회의 대표를 비롯하여 미국 등 여러 나라 대사를 지냈으며, 1957년 국제사법재판소 판사 역임. 그 후 중화민국 국제연맹대표가 되었으며. 웰링턴 쿠(Wellington Koo)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는 세계적 외교관임.
8) 1880~1948. 중국의 군벌(軍閥). 정치가. 북양(北洋) 군벌 직예파(直隸派)의 거두였으나 국민당에 입당하여 북벌(北伐)에 참가했음. 뒤에 반(反) 장개석 운동을 벌였으며, 항일전쟁에도 활약. 2차대전 후에도 내전(內戰) 반대를 주장. 1946년 도미(渡美).
9) 1930년 당시 중국 산서성(山西省) 대표. 국회의원.
10) 원세개(袁世凱)의 둘째아들.
◈ 1930년(庚午): 31세 청년들에게 정신연구[硏精] 권고하며 지냄. 이후 솔선수범하며 35세까지 매년 몇 달씩 농한기인 겨울에 정신수련을 계속함. 갑사(甲寺) 계곡 용문폭포와 간성장(艮成莊)에서 제자들과 겨울철 정신수련 결사(結社). (별 성적 없었음) ◈ 1931년(辛未): 32세 계룡산 북록(北麓)에 연정원(硏精院) 건물 낙성(落成). 당시에는 [연역재(演易齋)]라 명명했으나, 재원(財源)의 미비로 실제 운영은 못함. ◈ 1932년(壬申): 33세 인천에서 차종환(車宗煥), 한상록(韓相錄), 조철희(趙哲熙) 군을 만남. ◈ 1935년(乙亥): 36세 산림벌채사업 시작. 청년들 많이 접촉함. '기사년(1929) 가을에 약간의 여자(餘資)로 아주 입산 준비를 하고 한일년(限一年) 입정(入靜)할 예산이 확립되어 오대산(五臺山)으로 갈 절차를 다했다가 우연하게 모씨(某氏)를 만나서 오대산행을 중지한 것이 내 제37차 실기(失機)였고, 기사년 동(冬)에 중국왕반(中國往返)을 하고 귀가해서 다시 입산 준비를 하던 중 모씨의 권고로 갑사(甲寺)에 입산해서 단시일로 하산하게 된 것이 내 38차 실기(失機)였다. 갑사 입산도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나 가정(家庭)이 가깝고 왕래가 잦아서 부득이 속히 하산하게 되고, 수련이 한도(限度)에 못 간 것이다. 오대산이나 묘향산(妙香山)이나 금강산으로 아주 1년을 한(限)하고 갔었으면 물론 그 이상의 수익(收益)이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마장(魔障)이었다. 입산 준비만은 비록 자금이 없이라도 1년쯤은 될 수 있었다. 모모(某某) 친족(親族)의 원조가 확약된 것이 있었다. 1년 내지 2년, 3년 정도까지는 할 수 있었으니 이 기회가 나의 가장 큰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었다. 경오(1930년) 겨울 입산은 또 갑사(甲寺)로 되어 신미(1931년) 조춘(早春)에 하산하였으나 별 성적이 없었고, 이 해에는 군산으로, 대구로 출입하며 계룡산 위에 연역재(演易齋)를 건축하려는 것이 무준비(無準備)로 실패하고 (_) 이렇게 임신년(1932)까지 경제적 자립을 도모하고 의존하지 않으려는 결심으로 별별 짓을 다해 보았으나 실패한 것이다. 이해에 차종환(車宗煥), 한상록(韓相錄), 조철희(趙哲熙) 군을 인천에서 만났다.' (1954년 일기 중) ◈ 1936년(丙子): 37세 12월, 부친 하세(下世). 향년(享年) 81세. 극도의 생활난으로 치상범절(治喪凡節:상례를 치르는 데 따른 당연한 절차)에 못 갖춘 점들이 많았음. 집상(執喪)을 예(禮)대로 못하고 겨우 형식을 지킬 정도였음. ◈ 1939년(乙卯): 40세 수십년래 희유(稀有)한 대한재(大旱災:가뭄) 발생. 전국적으로 많은 피해. 일본을 왕래하며 근근이 호구(糊口)함. (인삼 장사를 함) ◈ 1941년(辛巳): 42세 의열단(義烈團) 사건으로 7개월 간 대전경찰서에 구금당함. 영어생활중 애국지사 여운삼(呂運三)씨 만남. 이후 해방까지 민생고(民生苦)가 극도로 참혹하였음. ◈ 1945년(乙酉): 46세 8.15해방. 38선으로 국토분단. 일제하 암약하던 동지회(同志會)를 재발족하고 동지 규합에 본격적으로 나섬. 해방 이후 교유(交遊) 인물:엄항섭(嚴恒燮), 조경한(趙擎韓), 조완구(趙琬九), 조성환(曺成煥), 조병옥(趙炳玉), 윤치영(尹致映), 조봉암(曺奉岩), 송대용, 홍찬유(洪燦裕), 권중돈(權重敦).[(단군)기원동지회(紀元同志會)] 수십명 동지 규합. 탑골공원 뒤 사무실 운영. ◈ 1947년(丁亥): 48세 상신학교 설립을 주도하여 두칸짜리 목조 건물로 임시 개교. 학교 설립시 사재를 들여 학교에 필요한 각종 기자재를 기증하였고 지속적으로 학교 재정을 지원. 임시개교 이후 공주 교육청에 분교 인허가 사업을 도맡아 하였으며 이런 노력에 힘입어 1952년에 반포공립국민학교 상신분교로 설립이 허가됨. 1952년 1회 졸업생 배출. ◈ 1948년(戊子): 49세 대한민국 건국. 이승만 정부 출범. 개천절(開天節:음력 10월 3일), 계룡산 아기봉하(牙旗峯下:삼불봉 아래) 석굴에서 정신수양차로 동지 7~8인이 함께 모여 [용산 연정원(龍山 硏精院)]이라고 처음 명명함. ◈ 1949년(己丑): 50세 백범(白凡) 김구(金九) 선생 암살당함. 천고유한(千古遺恨)의 민족적 손실이었음. 당시 김구 선생 영도(領導)의 한국독립당(약칭 [한독당]) 중앙집행위원 겸 계룡산특별당부 위원장을 맡아 정치 일선에서 활동중이었음. ◈ 1950년(庚寅): 51세 해방 이후 수차 상경(上京), 체류하며 겨우 지반(地盤)을 잡자 6@25사변 발발. 상신(上莘)으로 단신 피난 후 인민군에게 피체(被逮), 수개월 간 사상교양장(思想敎養場) 신세를 지다 기적적으로 생명을 보전함. ◈ 1951년(辛卯): 52세 이 해 봄에야 비로소 제자 권오훈(權五勳:당시 국회의원), 한강현(韓康鉉), 주형식(朱亨植) 등 수십인이 6.25에 희생되었음을 알게 됨. ◈ 1952년(壬辰): 53세 4월에는 지방의회의원 선거 출마(공주), 낙선. ◈ 1953년(癸巳): 54세 충청남도 교육위원회위원 선거 출마, 당선. ◈ 1959년(己亥): 60세 계룡산 구룡사지(九龍寺趾) 구곡(九曲) 위쪽에 연정원 건물 신축, 준공(세 칸 초옥이었음). 성주영(成周榮), 지정현(池正鉉) 등 수련. '해방 후 한독당(韓獨黨)에 가입하여 비좌비우(非左非右)의 민족독립노선으로 외세의존세력 타파에 앞장섰으나, 결과는 좌익, 우익 양편에게 탄압만 받았다. 6@25사변 전에는 빨갱이라고 대한민국경찰에 붙들려가 몇 개월씩 옥살이하고, 6@25 터지자 이번에는 인민군에 반동분자로 잡혀 또 옥살이, 구사일생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일제치하에선 요시찰 불령선인(不逞鮮人)으로 왜경들에게 탄압받고 영어생활만 수십차였다. 일생 하루도 맑은 날이 없었던 느낌이다. 누구를 위해 싸워왔던가 스스로 의심이 난다. 그러나 앞으로도 이 싸움만은 그치지 않을 작정이다.' (1960년대 일기 중) ◈ 1951년(辛卯): 52세~1963년(癸卯): 64세 충남 공주군 반포면 상신리에 칩거. 매우 곤궁한 생활상. ◈ 1964년(甲辰): 65세 상경(上京), 한의원(漢醫院) 개업. 인술(仁術)로 수많은 난치병 환자를 고침. ◈ 1974년(甲寅): 75세 봉우선생님의 상신초등학교 설립을 기려 마을 사람들이 상신리 입구에 송덕비를 세움. 상신초등학교 학부모들이 처음 건의를 하였고 마을 사람들이 모금운동을 하여 비용을 마련했다. 비문은 당시 상신초등학교 교장이던 이병오씨가 작성했으며 행사 당일 마을 잔치를 열었다. 충남도교육청 간부를 비롯한 외부인사도 대거 참석한 큰 행사였음. "봉우 권태훈 선생은 약 오십여년 전에 충북 영동에서 이곳으로 이주 하신후 한학교육으로 수많은 청소년을 선도하셨고 제반 애로와 난관을 무릅쓰고 벽촌인 이 지방에 상신국민학교를 창설 후세 교육에 큰 도움을 주셨으며 거액의 사재를 들여 학교에 교기를 비롯하여 많은 시설을 장만해주시는등 이 지방과 학교의 발전을 위해서 크게 공헌하셨기로 이 송덕비를 세움. 서기 1974년 3월. 상 하신 동민 일동 세움" (송덕비 비문) ◈ 1982년(壬戌): 83세 민족종교 대종교(大倧敎) 제12대 총전교(總典敎) 취임. ◈ 1984년(甲子): 85세 소설 《단(丹)》 출간. 봉우 선생 구술 내용을 작가 김정빈이 소설로 지음. 40만부 이상이 나간 당시 초베스트셀러로서, 이후 [단열풍(丹熱風)]이라는 사회현상으로 자리잡음. 단(丹), 단학(丹學), 단전호흡(丹田呼吸) 등의 용어가 널리 일반에 정착되었고, 민족고유의 선도(仙道), 정신사(精神史), 민족 상고사(上古史), 단군역사 및 기원(起源) 문제, 각종 민족정신수련법들에 대한 주의(注意)와 세간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증대된 계기가 됨. 당시 기성 지식층들은 국수주의적, 복고적(復古的), 현실도피적 망상가로서 봉우 선생을 비판하는 경향을 보였으나, 북한 김일성 공산독재와 박정희, 전두환으로 이어지는 대한민국의 군사독재 치하에서 암울한 민족분단 고착화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대다수 국민들은 소설에서 보여주는 봉우 선생의 민족과 국가의 장래에 대한 원대한 비전, 즉 금세기 안의 남북통일 완수와 21세기 초 세계중심국가로의 대약진이라는 가시적(可視的) 예언에 숨통을 틔우고 환호함. ◈ 1986년(丙寅): 87세 민족정신수련단체 [한국단학회 연정원] 서울 광화문에 설립, 총재에 취임. 사단법인 유도회(儒道會) 이사장 취임. ◈ 1989년(己巳): 90세 수필집 《백두산족(白頭山族)에게 고함》 출간(1월). 《천부경(天符經)의 비밀과 백두산족 문화》 출간(11월). 구술(口述) 및 감수(監修). ◈ 1990년(庚午): 91세 백두산 천지(天池)에서 천제(天祭) 봉행(奉行). ◈ 1992년(壬申): 93세 《민족비전 정신수련법》 출간(8월). 구술(口述)과 저술(著述) 및 감수(監修). ◈ 1994년(甲戌): 95세 양력 5월 16일 오전 9시 36분, 충남 공주시 반포면 상신리 자택에서 선화(僊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