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순(36세, 컴퓨터공학 박사과정)

1992년도 언제쯤인지 정확히는 기억이 안나지만 봉우선생님 댁에 문병(問病)을 갔을 때 이야기이다. 여럿이서 동행을 하였는데 가서 보니 선생님은 자리에 누워 계셨고 얼굴도 초췌하니 많이 쇠약해 보이셨다. 그 날 따라 유난히 늙어보이셨고 끙끙 앓으시는 소리도 자주 내시곤 하여서 나의 마음 또한 편치 못했고 한편으로 평소 선생님에 대해 갖고 있던 믿음이나 신뢰감 같은 것이 가라앉는 것 같아 무척 실망이 되었다. 특히 일행중의 한 사람이 수지침을 놓아 드린다고 선생님 손바닥에 침을 놓자

"아이고, 나 죽는다."

하시며 큰 소리로 비명을 질러대시는게 아닌가? 옆에서 내가 보기에도 민망스러울 정도로 엄살(?)을 떠시는 것 같았다. 나는 속으로 아니 그래도 선도(仙道)의 높은 경지에 도달하셨다는 분이, 소위 도인이시라는 분이 이럴수가 있는가. 이렇듯 큰 병도 아니면서 침 같지도 않은걸 맞으며 무슨 그리 대단한 통증이 온다고 저리 부산을 떠시나 하는 의아함과 함께 내가 사람을 잘못 봤나 보다, 내가 생각했던, 존경했던 분은 이런 분이 아닌데, 좀 더 세상사에 초연하고 매사에 의젓한 기품 있는 분이었지 이런 분은 아니었어. 그래 내가 잘못 봤나봐… 하는 느낌이 강하게 왔다. 그러면서 빨리 자리를 뜨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말씀도 잘 뇌리에 들어오지 않아 듣는 둥 마는 둥 하다가 자리가 끝나가자 얼른 일어서며 인사나 드리려고 무심코 선생님 얼굴을 쳐다보았다.

바로 그때였다. 기적이 일어난 것은. 내가 선생님 얼굴을 보자 선생님은 빙그레 웃고 계셨다. 그런데 선생님의 웃는 모습을 보는 순간 내 눈은 선생님 눈동자에 그대로 고정되면서 마치 무엇에 홀리듯 송두리째 빨려 들어갔다. 동시에 주변 모든 정경이 사라지고 내 눈의 망막은 선생님의 두 눈동자로 가득 채워졌으며 온갖 움직임과 소리가 사라진 멍한 진공상태가 되었다. 갑자기 눈동자와 눈동자만이 존재하는 정신상태가 된 것이다. 그 때 나는 보았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눈동자! 그 찬란한 빛의 덩어리를, 그 아름다운 발산을. 내가 세상에 태어나 가장 아름다운 존재를 보게 된 첫 순간이었다. 살아오면서 이렇듯 아름다운 눈동자는 실로 처음이었다. 이건 정말 최면도 아니고 아름답다고 얘기할 수밖에 없는 신비한 체험이었다. 이렇게 아름다움을 느끼고 있던 중 갑자기 고요한 정적속으로 눈앞의 눈동자 그 너머가 보였다. 아! 이것은 또 하나의 기적이었다. 나는 선생님의 눈동자 너머로 우주를 보았던 것이다! 정녕 이렇게 밖에 표현 할 도리가 없다. 나의 말이나 글로는 적당히 이 상황을 드러낼 방법이 없음을 고백한다.
잠시 후 다시 주변의 사물이 보이고 소리가 들려왔다. 내 눈앞의 선생님은 여전히 웃으시며 나를 보고 계셨다. 그리고는

"자, 잘가요."

도로 자리에 누우셨고 나도 인사를 드리고 밖으로 나왔다. 밖에 나와 생각하니 참으로 기이했다. '순간에서 영원으로'라는 말을 들었지만 실로 짧은 눈과 눈의 마주침에서 나는 거대한 우주의 실재(實在)와 그 아름다운 진면목을 보았다. 이것은 내 삶의 중요한 전기가 되었고 크나큰 영혼의 깨달음을 내게 가져다주었다. 이날의 기적을 나는 잊지 못한다.
또한 그간 일상을 살아오며 피상적으로 나와 주위의 뭇 존재들을 경박하게 판단하던 나의 나쁜 습관을 이렇듯 내면의 기적으로 치유해 주신 선생님의 속 깊은 배려를 정녕 잊을 수 없다.
감사드리고 감사드리며 한번 지펴진 내부혁명의 불꽃을 앞으로 잘 피워나갈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갈 작정이다.

* 엮은이 글   사람의 눈은 영혼의 창문이라, 눈과 눈의 마주침에서 순수한 영혼의 대화가 태초의 정적속에서 진행되었다.
진정 아름답고 신비한 만남이었음을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